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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자료집 만드느라 스트레스 받는 날 ~

갯버들^^ 2006. 4. 10. 21:48

     
    1925년 송파리

    15대 향시중의 하나인
    송파장이 있던 이것은 한강을 오르내리는 송파나루터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나 1925년 7월9일 부터 17일 사이에 큰 비가 내려 송파마을과 장터는 유실되고 모래사장과 강줄기로 변해버렸다.

                

    1920년대의 잠실리

    잠실리의 마을 이름은 고양군 뚝도면에 속해 자마장(뚝섬)리의 남쪽에 있는데 섬은 두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북안에 연한 것은 신천리, 남안에 연한 것은 잠실리이다.
    전에는 자마장리와 연속된 반도였으나 홍수로 인해 북안에 작은 지류가 생겨 섬이 되었다.

    을축대홍수때 물에 잠긴 한강변

    1925년 7월 9일부터 12일까지 4일간 서울에 383.7㎜의 큰비가 내려 많은 가옥이 침수되고 이재민이 생겼다. 이 당시 비가 잠시 그쳐 사람들은 젖은 옷을 말리고 침수된 곳을 매만지고 복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흘뒤인 7월 15일저녁부터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개부심한다고 생각했으나 집중호우로 변하여 19일까지 5일간 365.2㎜의 강우량을 나타냈다. 이른바 1,2차 홍수로 일컬어지는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인도교의 최고수위가 11.66㎜를 기록했다.

    1970년 이전의 잠실지구

    1930년대만해도 뽕나무가 무성했으나 1950년대 이후 주민들은 뽕나무를 뽑아내고 모래밭에 배추, 무우, 오이, 호박등의 채소와 꽃을 가꾸며 3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잠실 하중도 물막이 공사

    1971년 4월 15일 양택식 서울시장과 500명의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잠실도 남동쪽과 송파동 성내천 사이 한강을 막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 당시 한강 폭350m. 깊이4m.)

    몽촌토성의 복원전 모습

    1977년대의 몽촌토성 외부에는 성내천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가 경작지로 이용되고, 성의 동북쪽 외곽 사이에는 [잣나무골] 남문을 중심으로 한 동서 양쪽에는 [몽촌]으로 불리는 자연부락이 있었다.

    1980년대 이전의 송파나루(석촌호수)공원

    1971년 4월15일 잠실섬이 하안남쪽의 물막이 공사로 원래의 한강은 인공호수인 석촌호수로 변하고 샛강이던 신천이 한강으로 변하였다. 그 당시만하여도 주변에 건물이 없었으나 현재는 주변에 대형건물들이 들어섰다.

    풍납 대홍수때의 현 우일로

    풍납동은 한강과 상면하고 있어 항상 수재의 위험을 안고 있는 마을이다. 1925년과 1972년이래 최대의 물난리를 몰고 온때는 1984년 9월 1,2일이었다. 1984년 9월1일 새벽, 상류의 화천, 의암, 춘천, 청평, 소양, 팔당 등 6개댐이 만수위에 육박하자 가두었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면서 부터 한강수위가 급격히 높아져 한강주변의 저지대는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배수지 범람등으로 침수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중 풍납, 성내, 망원동 등 150개지구, 20,962가구가 침수되었으며 수용 이재민도 85,000여명으로 집계되었다.


    한성백제와 조선의 도읍 추정도

    한강을 중심으로 한 2,000년전의 백제하남위례성의 추정범위와 조선시대의 도성과 한성부 성지 10리의 경계

    여지도의 광주부

    18c중기(영조)에 그려진 군현지도의 특징은 읍치(邑治), 즉 군현의 행정중심지를 지도의 축척에 관계없이 크게 그리고 있고, 관아의 배치와 읍성, 倉, 浦口, 주요 山과 하천을 그림으로 그린 일종의 그림지도이다.

    팔도군현지도(광주)

    18世紀 中期(정조 이후 사본)
    전국의 郡縣을 地理座標로 30里 간격의 좌표, 즉 方眼을 이용하여 모든 군현을 동일 축척으로 그린 道別郡縣圖集이다.
    지도의 내용은 산맥과 河系網은 상세히 그림으로써 지형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고, 좌표와 지도의 주변에 연결되는 郡縣名을 표시하여 상대적인 위치와 지도의 연결을 쉽게하고 있다.
    연결 관계로 인접 군현의 일부를 필요로 할 때는 그 부분을 여백에 삽입하고 점선으로 그 경계를 표시하였다.

    1861년 김정호 대동여지도

    역지도 광주군 주변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으며 그당시 중대면에는 727호에 3,237명(남 1,438명, 여 1,799명)이 살고 있었으며 송파는 도성으로부터 광주를 가는 길목에 서있음이 표시되어 있다.

    광주전도

    1872년(고종9), 신미양요 직후에 전국 군현지도 편찬의 일환으로 제작된 廣州府지도 지도의 위쪽이 서북이고 아래쪽이 서남쪽이다.
    지도의 상단부에 있는 언주면, 중대면, 대왕면, 서부면 등은 지금은 서울특별시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 일대에 해당한다.
    松坡津과 三田渡 사이에는 酒幕, 擺撥, 鎭舍, 碑閣 등이 있어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초 지형도

    1963년 서울특별시 성동구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의 지역과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양동(잠실.신천)의 지역이었다.
    1960년의 우리지역은 탄천과 성내천이 연안의 한

    1963년 송파지역의 지도 (서울특별시 최초 편입시 지도)



    1963년 1월 1일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성동구 출장소인 송파출장소는 송파동(송파, 석촌, 삼전, 가락), 왕천동(이동, 방이동, 오금동), 거문동(문전동, 장지동, 거여동, 마천동), 원저동(일원동, 수서동), 자현동(자곡동, 율현동), 세곡동 등 6개 동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