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함께^^*

지역별 소나무 종류가 다르고, 활엽수를 소모시켜 소나무만 남아서..기온이 높아지면 소나무는 추운곳으로 올라가요.

갯버들^^ 2005. 11. 25. 00:54
한반도에 역사가 시작되면서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해온 나무는 단군왕검의 신단수로 시작하는 박달나무에서 삼국시대를 주름잡았던 느티나무, 참나무로 이어졌으며, 고려조의 대표적 문화재인 팔만대장경판의 산벚나무와 돌배나무로 그 맥을 더듬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면서는 온통 소나무와 관련된 삶의 역사만 남아있다.

몽고란, 여말의 왜구 퇴치를 위한 배만들기 등에 우리 강토의 산림자원은 너무 많이 파괴되어 활엽수로 덮여있던 우리의 산은 자연스럽게 소나무로 차츰 차츰 덮여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우리의 나무문화를 소나무문화라고 까지 하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선왕조에 한정하여야 되지 않나 싶다. 얼마전 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삶에는 솔잎의 은은한 향기를 머금고 고개마루의 소나무 사이를 빠져 나온 삼복더위의 솔바람을 잊지 못하였다.

노오란 소나무 꽃가루로 만든 송화떡의 감칠 맛에 군침을 삼키고 어려운 시절 짙은 갈색의 송피떡 한 조각으로 한 끼를 때우던 추억이 그렇게 먼 과거만은 아니었다. 어머니의 태를 자르고 세상에 태어났음을 알리는 첫울음과 함께 소나무 장작으로 데워진 따뜻한 물에 씻겨지는 것으로 인생의 긴 역정을 시작한다. 소나무로 지어진 집에서 소나무 장작으로 취사와 난방을 하면서 소나무로 만든 각종 기구를 사용하고 살다가 죽어서는 소나무로 만들어진 관에 들어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얼마전 산림청이 여론조사기관인 한국갤럽을 통해 일반인을 상대로 좋아하는 나무를 설문한 결과 절반 가까운 45.7%가 소나무를 꼽았다. 2위를 차지한 은행나무가 7.5%에 그쳐 일반인의 소나무에 대한 선호가 압도적임을 보여 줬다. 다음으로 동백나무가 가장 좋다는 응답이 5.5%였고 감나무 3.0%, 향나무와 잣나무가 각 2.9%로 뒤를 이었다. 또 죽은 다음에는 묘지의 둘레나무로 소나무가 심겨지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실려있다. 고구려 9대 임금인 고국천왕이 죽고 후사가 없자 왕비 우씨는 시동생인 연우와 내통하여 다른 시동생을 따돌리고 연우를 10대 산상왕으로 추대한 후 자신은 또 왕비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우씨는 왕비를 두 번 한 셈이다.

11대 임금인 동천왕(東川王) 8년(서기234)조에 보면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후 무당이 동천왕에게 말했다. '고국천왕의 혼백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동천왕에게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고국천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한다.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는 죽은 후에도 시동생이자 정부이었던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혼백이 된 후에도 계속 만나고 있었으니 어지간히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런데 고국천왕의 선택은 저승에서도 산상왕을 잊지 못한 우씨에게 아예 무덤 속에서 나오지도 못하도록 꽁꽁 묶어 놓으라고 부탁하기라도 하련만 오히려 자신의 무덤을 소나무 7겹으로 둘러싸서 우씨의 행동을 볼 수 없도록 부탁하였다.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일지는 생각에 따라 다르겠으나 오늘 날 소나무를 묘지의 둘레나무로 심은 것은 한번 눈 감아 버린 풍진세상 무슨 일이 있더라도 두 번 다시 보시지 말라는 후손들의 주문이 아닐런지?

삼국사기 애장왕조에 추위 때문으로 얼어죽은 소나무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전부터 소나무는 우리 선조들의 친근한 나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에도 동국이상국집, 고려사, 동사강목 등의 사서에 소나무 보호에 대한 기록이 있어나 강력한 소나무 보호정책을 편 것은 이조에 들어와서이다. 이조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지에 궁궐을 신축함으로서 우량한 재질의 소나무는 대량으로 벌채되고 해군력 강화를 위하여 배를 만드는데 많은 소나무가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나무재에 대한 급속한 수요창출로 공급이 부족함으로서 이조 초기에는 강력한 소나무보호정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선조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는 조항으로서 소나무의 벌채를 규제하고 있었고 세조실록에는 군선에 쓸 나무가 부족하므로 관가나 양반의 집도 우량소나무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였고 서민의 집은 아예 잡목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종때는 우량소나무가 분포하는 지역의 보호를 위하여 땔나무, 화전 등을 금지한 금산(禁山)지역을 전국에 200여곳 정하고 장부에 기록하여 엄하게 규제하였다 한다. 그러나 조선조의 소나무 보호정책은 군선의 제조기법이 낙후되어 수명이 너무 짧고, 화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송정(松政)의 비효율성 등으로 조선 말기에 오면서 우리 나라의 우량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었다. 이는 오늘날 일부 산간 지방과 잘 보호된 지역의 소나무를 제외하면 꼬불꼬불하게 자라는 볼품없는 나무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소나무에 대한 이조시대의 건축재 사용제한은 주요 사찰의 건축재가 무량사 극락전의 기둥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젓나무와 느티나무 및 상수리나무 등의 잡목을 사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 같다. 소나무의 사용 예는 건축재, 선박재, 가구재, 조각재 등 일일이 들 수 없을 만큼 많으며 우리의 문화재에서 소나무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

북부의 고원 지대를 제외한 전국에 자라는 상록침엽수 교목으로 나무높이 35m, 지름 1m에 달한다. 나무 껍질은 오래되면 아래부분은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윗부분은 붉은색이므로 적송(赤松)이라 하다. 잎은 2개씩 속생하며 잎 끝에 모여나기의 형태로 배열한다. 꽃은 2가화이나 1가화인 것도 있으며 5월에 꽃이 피고 달걀모양의 원추형이며 이듬 해 9∼10월에 황갈색으로 익는다. 실편은 벌어지고 끝이 바늘처럼 찌른다.

목재는 재질이 연하고 부드러우며 강인하고 무늬가 아름다워 건축용재, 일반용재, 펄프재등으로 널리 쓰인다. 솔잎, 내피, 송진, 꽃가루는 식용한다. 경상북도 울진에서 시작하여 태백 산맥을 중심으로 금강산 일대에 걸쳐 자라며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고 수피의 밑부분은 회갈색, 윗부분은 황적색이고 결이 곧는 것을 강송(금강송, 춘양목, for. Erecta Uyeki)이라 하며 중요한 조림 수종이다. 또 줄기가 몇 개씩 올라오고 모양이 원추형으로 아름답게 퍼지는 반송(for. Multicaulis Uyeki)과 가지가 밑으로 처지며 수관이 넓게 퍼지는 처진소나무(for. Pendula Myer)가 있다. 모양이 비슷한 곰솔과의 구별은 소나무는 수피가 적갈색이고 겨울눈과 새싹이 처음 나올 때 색깔이 적갈색인 반면 곰솔은 수피가 검고 겨울눈과 새싹은 회백색인 것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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